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100이라 숫자는 전부, 전체 혹은 모든 것을 말하는 낱말이다.
따라서 바카라 룰(百貨店)은 없는 것 없이 모든 물건이 전시, 판매되는 곳이다. 경제적으로는 시장 진출의 소식이며 물질문화의 전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 바카라 룰이다. 물론 경제 침략의 첨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바카라 룰은 갖가지 옥외광고의 전시장이요 집대성이다.
차경환의 <경성의 바카라 룰과 주변이라는 좋은 글 가운데는 서울의 상가 중심이 된 남대문로 주변 및 유일한 조선인 경영 바카라 룰인 종로 네거리에 있던 화신(和信. Whashin)을 포함한 5개 바카라 룰에 관한 흥미로운 자료들이 나와 있다. 지금은 충무로이지만 일제 강점기만 해도 혼마치(본정. 本町)이라 해서 경성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지고 유행의 선단이던 거리의 컬러 사진들이 그의 글 가운데 나와 있다.

우선 5개 바카라 룰 중 4개의 포장 스티커(Seal)가 있다. 지금은 신세계 바카라 룰이 된 미츠코시(三越. Mitsukoshi), 퇴계로 입구에 있다가 사라진 히라타(平田. Hirata)와 미나카이(三中井. Minakai) 그리고 롯데 영플라자가 된 쵸우지야(丁子屋. Chojiya)이다. 쵸우지야는 슬로건 두 개와 깃발이 있다.

경성 진출의 연도가 경성 5대 바카라 룰의 개요표에 나와 있는데 쵸우지야(1904), 미츠코시(1906), 히라타(1908), 미나카이(1911)의 순이다. 미츠코시는 1906년에 바카라 룰을시작했고 미나카이, 쵸우지야, 히라타는 1920년대 중반, 그리고 화신은 1932년에 바카라 룰 사업을 시작했다. 점포 증,개축(增,改築)이 있는것은 1920-30년대 후반이었다. 달리 보면 일본과 그 식민지이던 조선의 경제가 눈부신 발전을 하던 1930년대가 전성기였다.
전체면적은 쵸우지야(3,793평), 미나까이(2,363평), 미츠코시(2,255평), 화신(2,031평), 히라타(799평)의 순이었다. 종업원의 수는 가장 적은 히라타가 200명이고 가장많은 곳이 화신의 623명이었다. 화신은 홀(Hall)이 500석에 이르러 가장 많았다. (동아일보가 2938년에 시작한 전국 상업학교 생도 대상 광고상 수상작 전시와 설명회 장소는 화신 바카라 룰 갤러리였다.)

1935년에서 1939년, 5년 동안에 이 5개 바카라 룰이 납부한 영업세는 15,849엔에서 약 70%가 성장해 26,637엔으로 증가했으니 연평균 성장률은 14%로 대단한 성장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화신의 경우였다. 바카라 룰이 된 1937~1939년 기간, 3개년의 자료인데 영업세 액이 2,701엔에서 5,850엔으로 112% 성장해 연평균으로는 37.3%라는 놀라운 성장을 기록했다.
유일한 한국인 경영 바카라 룰이며 그 당시 조선은행(한국은행) 주변 흔히 남촌이라 부르던 지역에 모여 있는 일본인 경영인 4개 바카라 룰과 북촌이라 부르던 전통적인 시장 종로에서 경쟁한 화신이었다. 평안남도 용강 출신인 창립자 박흥식은 대단한 사업가였다. 해방 이후 그의 친일 행각과 경영 부진으로 화신은 이름만 남아 있다. 종로 네거리에 있던 웅장한 건물도 사라졌다. 화신은 현관과 옥상 그리고 내부 장식들이 모두 현대적 옥외광고물의 집대성이었다.
일제시대 시골 6학년 수학여행 필수 방문 코스였다. 아울러 ‘공짜’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처음 타보는 곳이 화신이었다. 일본인 경영 미츠코시(三越)는 신세계가 되었고 그 건물은 서울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신인섭(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